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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장세의 정체 (통화량, 금융상품, 실물경기)

by worthy-loo 2026. 2. 25.

"유동성 장세"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 "돈이 많이 풀렸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계실 겁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몇 해 전, 운용팀과 리서치팀이 함께했던 한 달짜리 스터디에서 이 개념을 뜯어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당시 시장은 분명 "돈이 풀렸다"라고 했는데, 체감은 달랐습니다. 기업 실적은 특별히 좋지 않았는데 특정 테마만 폭등했고, 실물경기 관련 업종은 뉴스 한 줄에 출렁거렸습니다. 그때 한 동료가 던진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돈이 도는 게 아니라, 돈이 멈춰 있는 곳이 바뀌는 거다."

세 양동이 유동성이 산업으로 흐름
미국 유동성이 섹터로 분기되는 그림

통화량과 금융상품, 같은 돈이 아니다

유동성이라는 말 속에는 사실 여러 층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M2, 그리고 더 넓은 개념인 LF나 L까지, 이 모든 것이 "유동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작동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M2는 현금, 요구예금, 단기 저축성 예금처럼 비교적 실물경제와 가까운 돈입니다. 반면 LF나 L은 금융기관이 발행한 각종 상품, MMF, ABS, 레포 같은 담보화된 금융상품까지 포함합니다. 쉽게 말하면, 전자는 "대출을 통해 실물로 흘러가는 돈"이고 후자는 "금융시장 안에서만 도는 돈"입니다.

제가 스터디를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이 구분이 시장 성과와 직결된다는 점이었습니다. M2가 빠르게 늘어날 때는 실물경기가 살아나고 산업재나 필수소비재 같은 업종이 선방했습니다. 반대로 금융상품 중심의 유동성이 확대될 때는 특정 섹터, 특히 기술주나 테마주가 독주했습니다. 같은 "유동성 확대"라는 말이지만, 돈이 흐르는 파이프가 달랐고, 그 파이프에 따라 수혜 업종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 저희는 이 차이를 "유동성의 색깔"이라고 불렀습니다.

최근 미국 시장을 보면 이 색깔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보입니다. 2025년까지는 IT 섹터와 경기소비재 중심으로 자금이 몰렸지만, 2026년 들어서는 필수소비재, 산업재, 유틸리티 같은 실물 관련 업종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업종 순환이 아니라, 자금의 흐름이 금융상품 중심에서 실물 대출 중심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금리 인하를 밀어붙이고, QT를 중단하고, 대차대조표 확장을 선언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금융상품만 부풀리는 게 아니라, 실물경제로 돈이 흘러가게 만들겠다는 의지입니다.

실물경기로 가는 길목, 신용창출

그렇다면 실물경기로 돈이 흐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핵심은 신용창출입니다. 누군가 대출을 받아야 공장을 짓고, 설비를 사고, 직원을 고용합니다. 이게 바로 광의통화(M2) 확장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바이든 정부 시기에는 이 신용창출을 의도적으로 억눌렀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플레이션이 문제였으니까요. 통화량이 늘면 물가가 오르고,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려야 하는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이든 정부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단기 국채를 대량으로 찍어내 금융시장에 담보를 공급하고, 은행들이 예금을 덜 받도록 유도했습니다. 그 결과 돈은 MMF나 레포 시장 같은 금융상품으로만 몰렸고, M2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현장에서 본 것도 비슷했습니다. 당시 은행들은 예금금리를 기준금리만큼 올리지 않았습니다. 예금을 받으면 대출을 해줘야 하는데, 대출을 늘리면 자본비율 규제에 걸리니까 아예 예금을 안 받으려 했습니다. 이걸 "디마케팅"이라고 부르더군요. 그 결과 개인 투자자들은 은행 대신 MMF로 돈을 옮겼고, 이 돈은 실물경제가 아니라 금융시장 안에서만 순환했습니다. 저희 팀에서도 이 흐름을 추적하며 "왜 현금성 자산은 늘어나는데 실물경기는 답답한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 노리는 건 이 흐름을 되돌리는 겁니다. 금리를 내려 대출 문턱을 낮추고, 은행 규제를 완화해 신용창출을 유도하겠다는 겁니다. 물론 리스크는 있습니다. 통화량이 빠르게 늘면 인플레이션이 재점화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생산성으로 인플레이션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게 실현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정책 방향은 확실히 바뀌고 있습니다.

한국 증시, 달러의 주차장이 바뀌는 중

그렇다면 한국 시장은 어떨까요? 최근 외국인과 개인이 대규모로 순매도했지만, 기관이 거의 같은 규모를 순매수하며 지수를 떠받쳤습니다. 이 수급 구조만 보면 "달러가 국내로 들어온다"는 말이 와닿지 않습니다. 실제로 원화는 약세를 이어가고 있고, 환율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한국 기업들의 포워드 EPS가 작년 말부터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업들이 돈을 벌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 돈이 곧바로 국내로 유입되는 게 아니라, 해외에 쌓여 있거나 특정 섹터에 집중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는 이 현상을 "달러의 주차장이 바뀌는 중"이라고 봅니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는 결국 누군가의 흑자입니다. 그게 미국 민간일 수도 있고, 해외 무역흑자국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후자입니다. 미국이 지금 밀어붙이는 산업, 즉 반도체, 방산, 전력(원전) 같은 분야는 한국 기업들이 강점을 가진 영역입니다. 이 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당장 국내 주식시장으로 들어오지 않더라도, 기업가치 상승으로 반영됩니다. 실제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들의 주가는 EPS 상승에 힘입어 올랐지, 밸류에이션 확장으로만 오른 게 아닙니다.

반면 현대차 같은 경우는 좀 다릅니다. 이익이 늘어나지 않았는데도 주가가 올랐다면, 이건 밸류에이션 리레이팅입니다. 로보틱스 같은 새로운 내러티브가 붙으면서 PBR이 낮았던 기업에 프리미엄이 붙은 겁니다. 이처럼 같은 "상승"이라도 그 내용은 천차만별입니다. 지수 전체로 보면 EPS 상승이 주도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코스닥 일부나 테마주는 이미 밸류에이션 거품이 끼어 있을 수 있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버블이 없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어디는 아직, 어디는 이미"라는 식으로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인플레이션은 중립적 현상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건, 인플레이션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물가가 오르면 모두가 힘들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인플레이션은 중립적 현상이 아닙니다. 가격 전가력이 있는 대기업은 물가 상승 초기에 마진을 늘립니다. 반면 소상공인이나 중소기업은 원가는 오르는데 가격을 올리지 못해 버티다가, 결국 못 버티고 문을 닫습니다. 그 순간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약한 고리입니다. 자산을 헐값에 팔아야 하고, 그 자산은 다시 여유 있는 쪽으로 넘어갑니다.

실제로 1970년대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심했을 때, 중산층은 서서히 사라졌고 양극화가 심해졌습니다. 그 이후 기업 이윤은 계속 올라갔지만, 노동소득은 정체하거나 떨어졌습니다. 이건 단순히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어디에 썼느냐의 문제입니다. 정부가 기업 케펙스(자본지출)를 지원하면 생산성이 올라가고 인플레이션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정부가 기업에서 세금을 거둬 개인에게 나눠주면, 재정 균형을 맞췄다 해도 인플레이션은 올라갑니다. 돈의 양이 아니라, 돈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겁니다. 재정적자를 내더라도, 그 돈을 생산성 있는 산업에 투입해 실물경기를 살리겠다는 겁니다. AI, 반도체, 전력, 방산 같은 분야에 집중 투자하면서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그 생산성으로 인플레이션을 억누르겠다는 시나리오입니다. 물론 이게 성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책 방향은 "금융상품 팽창"에서 "실물경제 확장"으로 확실히 틀고 있습니다.

결국 투자자 입장에서 중요한 건, 유동성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돈이 많다/적다"로 이해하지 말고, 그 돈이 어떤 파이프를 타고 어디로 흐르는지를 보는 겁니다. 금융상품 중심이냐, 실물 대출 중심이냐에 따라 수혜 섹터가 달라집니다. 지금은 그 전환기입니다. 저는 이 흐름이 적어도 2026년 내내 이어질 거라고 봅니다. 특히 케빈 워시 같은 인물이 연준 의장으로 오면, 금리 인하와 함께 통화량 확장 드라이브가 더 세질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실물경기 관련 업종, 그리고 한국에서는 반도체·방산·원전 같은 섹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동성 장세가 끝난 게 아니라, 색깔이 바뀌고 있을 뿐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9gG8NDUu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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